제목: 데미 로바토와 여성됨으로부터의 탈출구

원제: Demi Lovato & The Womanhood Trapdoor

원작: 유튜버 Lisa Mich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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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실이 당신을 불편하게 한다고 해서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여러 계층의 여자들이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이나 여성됨의 여러 측면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어떤 여자들은 자기 신체에 불편함을 느낀다. 고통스럽거나 불규칙적인 월경, 자궁내막증(endometriosis), 난소 낭종(ovarian cysts), 다낭성 난소 증후군(PCOS), 외음부통(vulvodynia), 요로감염(urinary tract infection), 무거운 유방에서 유발되는 허리통증 등 여러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다른 어떤 여자들은 심리적인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는데, 사회에서 여자들에게 기대하는 여성상, 성적으로 이상화된 여성상에 부합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 요인이다. 그러한 여성상은 여자들에게 본인들의 성향과 욕망에 무관하게, 조용하고 상냥하며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는 한편, 순종적이고 굴종적이기를 요구한다. 

그러한 신체적, 심리적인 불편함은 물론 실재하며 그로 인해 큰 고통을 야기하겠지만, 실제 현실 세계의 사실들을 왜곡시키지는 못한다. 만약 여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서 성인으로 자라난다면, 당신은 여자가 될 것이며, 평생 동안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 굳이 밝히는 것도 우스꽝스럽지만, 어떻게 하겠나? 우리가 당면한 상황에 필요한 것을. 여성됨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무 의미나 부여해도 상관이 없는 유동적인 개념이 아니다. 여성됨은 구체적이고, 물리적으로 관찰 가능하며, 측정이 가능한 상태이다. 여성됨은 심리적인 상태도, 추상적인 개념도 아니며, 불편하다고 해서 벗어던질 수 있는 복장은 더더욱 아니다. 인류의 절반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그 현실이 주는 불편함에서 도망치려하기 보다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불편감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최근에 대중 가수 데미 로바토(Demi Lovato)가 자신이 '논바이너리'라고 불리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개념으로 정체화를 했다고 "커밍아웃"을 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뜻인데...? 수상한 단체 휴먼라이츠캠페인(Human Rights Campaign)은 논바이너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자이고, 남자와 여자 그 중간쯤에 있거나, 혹은 이러한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있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 이게 당췌 무슨 개소린지... 어쨌든 이러한 논바이너리의 정의나 데미 로바토의 커밍아웃도 결국에는 실제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잠깐 토막 상식: 1633년에 카톨릭 교회에서는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돈다는 자신들의 근거 없는 착각을 공고히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 반대한 천체학자 갈릴레오를 종신형에 처한다. 그러나 실증할 수 없는 주장을 고집하면서, 그에 반대하는 이들을 감옥에 처넣어도 실제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교회는 갈릴레오를 수감시킴으로서 이단자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했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현실로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한 여자가 자기가 '여자가 아니'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본인이 여자라는 실제 현실이 바뀌지도 않는다. 누구든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자유는 있고, 글로 쓸 자유도, 마음 가는 대로 영어나 기타 언어체계를 뒤섞어놓을 자유도 있다. 그래도 선언으로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머리스타일을 바꾸고, 호르몬 주사를 맞고, 각종 수술을 하고, 이름을 바꾸고, 자신을 "they/them(3인칭의 성별 중립적인 단수형 대명사)"으로 부르라고 요구해도 여성이라는 성별을 바꿀 수 없다. 이는 예외가 없는 사실이다.

데미 로바토의 지난주 공개선언은 개인적으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악마와 함께 춤을(Dancing with the Devil)"이라는 데미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첫 번째 에피소드를 지난 3월에 봤기 때문이다. 여기 유튜브에서도 이 시리즈에 대한 광고가 많이 나왔었는데 나는 진심으로 데미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나는 내 단짝친구가 헤로인 중독으로 명을 달리했던 경험이 있고, 나도 개인적으로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물론 안 그런 사람이 어딨겠냐만). 그래서 데미의 약물 중독이라든가 다른 고난과 역경에 자연스럽게 끌렸던 것 같다. 내가 첫 번째 에피소드를 시청하면서 깜짝 놀라 멈춘 순간들이 몇 번 있었는데, 데미가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뻔한 느낌을 받아서다. 본인의 세계를 마침내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것처럼 하다가 정말 아슬아슬한 차이로 실패하는 비극적인 순간들이었다. 데미가 직접 이야기하는 모습을 통해 확인해보자.

 

("악마와 함께 춤을(Dancing with the Devil)" 중 일부)
그렇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청소년 미인대회 무대에 올라야 했고, 그러한 냉혹한 경쟁 속에서 제 자존감은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 제 개인 매니저팀은 비서랑 건강 코치, 식단 관리사, 영양사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 제가 제 자신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 게 아니라 남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느낌이예요. -- 지금 제 몸이 편하다는 느낌이 없어요. 좀 마음의 평온을 얻으려고 음식 조절을 엄격하게 안 하기 시작했는데 살이 조금 찌기 시작하니깐, 매일 밤 무대에 나서기도, 몸이 드러나는 무대 의상을 입기도 싫어져요. 그냥 이 업계에서 여자들의 외모와 몸매가 어때야 한다거나, 어떤 옷을 입어야 한다는 식의 압박이 너무 강해요. -- 저는 제가 어떤 완벽한 역할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 업계에서 여자들의 외모와 몸매가 어때야 한다거나, 어떤 옷을 입어야 한다는 식의 압박이 너무 강해요." 앞의 영상들에서 내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데미 자신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여자들이나 여성 청소년들에게 비현실적인 외모 기준을 충족하고 유지하라는 구조적인 압력을 가하는 연예 산업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말도 안 되는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첫 에피소드의 제목인 "Losing Control(통제를 잃다)"은 데미가 이 구조에 완벽하게 자신을 끼워맞춰야 하는 부담을 지고 있으며, 그 부담을 회피하는 것은 여자로 태어난 본인의 의무를 져버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진실은, 데미가 애초에 자신의 상황에 대해 통제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해두고 넘어가자. 데미에게는 문제가 없다. 어떤 여성이 이러한 비현실적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비현실적인 기준이 문제다. 구조가 문제다. 더욱 심해져가는 성차별주의가 문제다. 여자가 된다는 것이 구체적인 '어떤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 '어떤 것'의 범위는 날마다 좁아져 간다. 내가 '어떤 것'이라는 단어를 괜히 쓴 것이 아니다. 왜냐면 데미 같은 여성들은 다른 이들의 유희와 쾌락에 이용되는 객체로 여겨지며,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주체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역할은 점점 더 좁아져가고 있고, 이 좁혀드는 흐름에 답답함을 느끼는 여성들이 절실하게 탈출구를 찾고 있다. 이러한 제약, 여자로 태어난 이상 굉장히 구체적인 딱 한 가지의 것만 될 수 있으며,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말하는 구조로부터의 압박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할 무언가가 탈출구 바깥에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데미의 이야기에는 언급하고 지나가고 싶은 다른 측면이 있다. 데미는 특정한 외모 기준에 맞추기 위해 큰 스트레스와 식이장애까지 겪은 것뿐 아니라, 성폭행 피해자이기도 했으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마약상에 의해 성적으로 이용당하고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서 방치되었었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종류의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탓하거나, 자기 자신의 특징을 곱씹으면서 '내가 이러이러하지 않았다면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마도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트라우마들이 데미로 하여금 '내가 여자가 아니라면 이런 부당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만약 그게 데미의 의중이라면, 아마 일리가 있는 말일 수도 있다. 여자들이 미적 기준과 성범죄에 훨씬 많이 시달린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통계학적으로 따지자면, 데미가 여자가 아니었을 경우 데미에게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날 확률은 훨씬 낮아졌을 것이다. 다만, 아무리 간절히 바라더라도 현실세계에서 여성됨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미가 지금도 앞으로도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여성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물리적인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데미나 다른 여성들이 사회가 그들에게 짊어지우는 협소한 역할이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라는 말과는 다르다. 그런 요구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성됨의 의미를 넓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여 여성들이 여성됨을 탈출한다는 불가능한 일에 목을 매지 않고 자신들의 모습 그대로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여성들을 성적대상화하고 도구화하는 구조에서 비롯되는 불편함을 완화하여야 한다. 여성들에게 특정한 역할을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그것을 거부하면 너는 여자도 아닌 무언가라고 말하는 구조 말이다. 개인주의적인 깨시민 문화는 여성됨이 무슨 상사가 맘에 안 들면 사직서 내고 때려칠 수 있는 직장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대신에 노동조합을 만들고 여성됨을 정의하는 규칙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 기왕이면, 아예 다 없애버리는 것도 좋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는 급격하게 여성들에게 해로운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20년 전에는, 성적인 대상화라는 것이 이 정도였다(브리트니 스피어스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물론 성적 대상화가 맞긴 하고, 이게 무해하고 순수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성적 대상화는 이런 모습이다(카디비와 메건 디 스탤리언의 공연 장면). 황금시간대에 전국구 방송사에서 송출하는 그래미 시상식인데도 스트리퍼 봉이 등장하고, 끈팬티를 입은 여성들이 다리를 벌리는가 하면 침대 위에서 온몸을 베베 꼰다. 이건 해방이 아니다. 임파워링도 아니다. 이건 착취이고, 치욕적인 일이며, 기존보다 한층 강화된 성적 대상화이다. 이는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과 여성청소년, 데미 로바토 같은 사람들에게 여성됨이라는 말이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암울하기 그지없다. 포르노 문화는 폭발적으로 성장해 주류 문화에까지 독성 폐기물처럼 스며들어서 여성들이 여성됨에서 탈출하고 싶게 만들고 있다.

남자들은 이런 메시지를 받지 않는다. 메시지의 수신자는 여자들뿐이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아름다움과 쾌락의 대상이며, 남자들의 궁극적인 역할도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식의 메시지에 노출되지 않는다. 딱 달라붙는 요가바지를 입은 남자 엉덩이 사진이 인스타그램에 도배되지도 않는다. 18세가 되는 날에 맞춰서 온리팬즈에 가입하여 노출을 하지도 않는다. 립필러와 성형수술 광고의 주 타겟층도 남자가 아니다. 이것이 현재 자라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이 살아가고 있는 암울한 현실이며, 이 여성들에게는 유일한 현실이다. 평생 접한 게 이런 것들뿐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오직 이런 메시지들에만 노출되어 다른 가능성과 잠재력은 접해보지 못했다면, 당신이라도 여성됨에서 탈출하고 싶지 않겠나.

여성들의 신체에 대한 대상화는 연예계나 소셜미디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의 모든 층위에 만연해있다. 지난주에 플로리다의 한 공림고등학교에서는 여학생 80명의 사진이 포토샵으로 수정되어 마치 이 청소년들의 몸에 부적절하거나 잘못된 부분이라도 있다는 식의 메시지로 해석되었다. 남학생들의 사진도 그렇게 수정되었을까? 아니. 그런 행위가 여학생들에게 부끄러움과 불안감을 유발하지 않았을까? 자신들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을 가능성은? 여학생들도 "이 일은 내가 남자였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탈출구를 찾고 싶어지지 않을까?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사회가 마치 여성에게 가해지는 괴롭힘과 강요에서 해방될 수 있는 탈출구가 존재하는 것처럼 제시한다면, 여학생들이 탈출구를 통해 나가려고 하지 않을까? 만약에 여학생들이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무슨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지? 탐사프로그램 "60분"에서 이번 달에 탈성전환자(detransitioner), 즉 한번 현실을 거부하고 자신의 성별과 자신을 분리하는 시도를 했던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방영했는데, 나는 그중에 한 젊은 여성의 증언에 특히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60분" 방영분 중 일부)
20대 초반의 나이에, 그레이스 렌딘스키 스미스씨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젠더디스포리아도 겪었다. "혹시 '남자들 인생이 더 쉬워보인다, 남자로 살면 내 삶이 더 쉬워질 거 같다'는 생각이 영향을 조금이라도 끼쳤나요?" "네, 전 그냥 트랜스남성이나 남성으로 살 수 있으면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고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 "저에게 '왜 테스토스테론을 처방받고 싶은 거냐'고 물었을 때 저는 '여성으로 사는 게 저랑은 더 이상 잘 안 맞는 거 같아요'라고 했죠."

남자들 인생이 진짜로 더 쉬울까? 뭐 격렬한 논쟁을 부를 만한 주제기는 하지만, 내가 어느 편에 설지는 아마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을 거다. 다만 남자들의 삶이 더 쉽든 어렵든 간에, 확실한 건 남자들은 여성혐오를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험하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 그래서 젊은 여성들이 여성혐오로 인한 경험을 부당하게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다가 여성됨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이 거대한 유행, 현실을 부정하는 환각적인 체험이 여성들에게는 바로 그러한 기회로 여겨지는 것이고 말이다. 한쪽에는 여성이 성적물화, 대상화되는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사는 "선택지"가 있고, 다른 쪽에는 여성됨을 완전히 거부할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진다. 문제는 이것이 현실과 동떨어져서 선택이 불가능한 선택지라는 점이다. 사실은 사실이고,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짚어야 하는 점은, 어떤 사실들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실은 변할 수도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실들도 있다. 여성됨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성이 성적대상화된다는 사실, 여성 6명 중 1명은 살면서 한 번은 성폭행을 당한다는 사실, 성희롱이 너무나 만연해있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은 실제로 우리가 바꾸고자 한다면 바꿀 수도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대신에 우리는 여자들이 여자인 게 싫으면 안 해도 된다는 식의 헛소리를 해대면서 바꿀 수 없는 사실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바꿀 수 있는 사실들, 여성들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들은 애써 무시하고 있다. 

성별을 바꾼다는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게 여성혐오를 줄이는 일보다 쉬운 것처럼 보일 정도이니, 말 다 했다. 그리고 소위 "논바이너리"라고 하는 탈출구는 논바이너리를 자청하지 않는 여자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제한하는 고정관념들과 고통, 불편함을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암시하기도 한다. 논바이너리들은 성차별에 반기를 드는 게 아니고, 성차별의식을 강화하며 그저 다른 방식으로 성차별에 순응하는 것이다. 여성들에게 이 상자가 안 맞으면 저 상자에 들어가라고 할 게 아니라, 상자에 집어넣기를 그만두자. 우리는 여성들을 위해서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 첫 걸음은 현실을 일단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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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쟁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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