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것들
Life After Beth (2014)
난 좀비가 세상을 파탄내는 영화를 잘 못 보는데 약점도 명확하고 느릿느릿한 것들에게 당할 정도로 인류가 멍청하진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는 기존 좀비물의 설정을 비트는 코미디이기 때문에 예외이다. 오브리 플라자님이 연기한 베쓰는 좀비가 되어서도 말을 할 수 있고 남자친구 재커리를 무작정 물려고도 하지 않는다. 대신 점점 더 충동적이고 폭력적으로 바뀌어갈 뿐이다. 연인과의 관계를 표현하는데 좀비라는 소재를 잘 섞은 것 같다. 오브리플라자님의 연기는 강렬하고 웃기고 최고였다.
+ 이 영화의 여성혐오적인 측면을 비판하는 트윗을 보고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여기에 링크를 붙임.
https://twitter.com/bookzowsky/status/906365754630586368
Don't Think Twice (2016)
이름은 전부 알지 못해도 얼굴은 눈에 익은 코미디언들이 나와서 즉흥연기 공연단(improv group)을 연기한다. 동료간의 질투나 우정이나 열정과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이 그려지는데 좀 많이 무난했다. 그 뭐라고 해야하나 즉흥연기라는 아트폼도 각본 있는 영화에서는 매력이 반감되는 것 같고.. (스포츠영화가 노잼인거랑 비슷)
Room (2015)
정말 정말 슬프고 감동적이고 따뜻한 영화이다. 올해의 영화로 선정하겠다. 2015년에 나온 영화지만 내가 2017년에 봤으면 17년 영화다. 간만에 얼굴 존나 못생기게 찌푸리면서 찔찔 짰다. 주인공 어린이의 시점에서 주로 보여주다가 더 많은 것들이 나중에 드러나는 식이기 때문에 미래에 볼 사람들을 위해 내용에 대한 말은 아끼는게 낫겠다. 플롯의 전환 이후에도 고민할 거리를 던져준다. 브리라르손님은 Scott Pilgrim vs. the World 영화하고 Trainwreck에서 조연으로 뵈었었는데 이 영화로 머릿속에 각인될 거 같다.
Orange is the New Black 2시즌 (2014)
1시즌 옛날에 보고 묵혀뒀다가 봤는데 왜 이 쇼가 최고인지 이제야 알 것 같은 기분이다. 1시즌을 볼 때의 내가 그냥 멍청한 새끼였거나 2시즌에서 OITNB가 완전히 피크를 찍은 것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여성 교도소를 배경으로 하는 말할 것도 없이 All Women 쇼이고 오만가지 연령대 섹슈얼리티 인종 종교 체형 가치관 직업 등이 포함된다. 1시즌이 주인공이 감옥에 들어오고 적응하는 과정이나 주인공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집중했었다면 2시즌엔 더 많은 캐릭터들에 하나하나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회상장면을 할당하면서 위에서 말한 다양성이 기계적인게 아니라 개별 인물들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과 동정심이 듬뿍 묻어나는 의식적인 선택이라는 걸 보여준 것 같다. 은행강도로 수감된 여자가 말년에 암을 얻은 후 삶의 마지막을 탈옥으로 장식하는 엔딩은 정말 좋아서 모니터 앞에서 기립박수 쳤다.
Ramsay's Kitchen Nightmares UK
유튜브로 우연히 키친 나이트메어를 보고 램지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음식은 잘 모르지만 이 사람의 인내력이나 사람에 대한 연민 같은게 되게 대단해보였다. 더러운 것도 기꺼이 만지려고 하고 아무리 답없는 인간을 대하더라도 어떻게든 가르치려하고 구슬려보려고 하고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것 등등... 미국판도 있고 UK판도 있는데 방송 자체는 UK판이 훨씬 세련되고 재미있었다. 미국판은 그 미국 리얼리티 특유의 끊임없는 개인 인터뷰와 패턴화된 갈등이 괴상하게 느껴졋다. 문제해결 과정을 찍으려는게 아니라 갈등 자체를 부각시키는게 지상과제 같아보임.
Where To Invade Next (2015)
마이클 무어가 미국에 없는/부족한 제도를 운영 중인 전세계 각지의 나라들을 찾아가 이 제도는 미국이 뺏어가겠따!라며 깃발 꽂으며 돌아다니는 다큐멘터리이다. 재미있고 유익했다. 빠르게 돌려보면서 내용을 정리해보겠다.
이탈리아: 충분한 유급휴가, 육아휴직, 2시간의 여유로운 점심시간 - 노조가 싸워서 이룬 것.
프랑스: 영양적으로 균형잡힌 공교육기관의 급식, 실용적인 청소년 성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 미국의 공교육 급식은 최악의 수준에다 성교육이 부족하고 비현실적이고 비인간적인 금욕주의를 강조하여 결과적으로 10대 임신율은 높아서 문제라고 한다. 누가 뭐라든 청소년들은 섹스를 할 것이기 때문에.
핀란드: 청소년들에게 숙제나 긴 시간의 학교 일과 시간 등의 부담을 덜어주고 모든 학교의 수준을 비슷하게 맞추되 표준화된 객관식 시험 같은 것은 실행하지 않는 공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슬로베니아: 대학교육에 비용이 들지 않는다. - 정부가 이를 바꾸려하자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정부를 붕괴시켰다고 한다.
독일: 업무시간과 개인 생활의 철저한 분리, 근로자들을 위한 휴양기관 제공 - 법적으로 노동자들이 이사회의 절반을 차지하고 노동자들이 회사의 의사결정에 관여하고 감시하게끔 만듦.
+ 나치독일 시기 유태인들을 억압하고 학살했던 역사를 꾸준히 교육시킴. - 노예제도나 원주민 학살 등의 역사적 과오들을 제대로 교육할 필요가 있는 미국.
포르투갈: 마약 소지 및 사용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마약 사용률을 줄였음. - 시민권에 대한 흑인들의 요구가 거세지자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흑인들을 집중적으로 감옥에 잡아넣고 노역을 시키며 그들의 투표권을 영구적으로 박탈함으로서 사실상 흑인들에 대한 제 2의 노예화를 진행해온 미국. 미국의 남쪽 지방이 선거에서 꼴통 레드넥들로 대표되는 이유가 이런데서 드러난다.
+ 국민건강보험제도가 뒷받쳐줘야 마약중독자들의 원활한 치료까지 이루어질 수 있을거라는 포르투갈 보건부장관분의 첨언. 아다시피 미국은 트럼프를 뽑음으로써 그나마 있던 오바마케어(혹은 Affordable Care Act)도 날려버렸으니 흐흠...
노르웨이: 탁트인 자연경관에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교도시설. - 재범률은 미국의 80퍼센트와 대조되는 20퍼센트에 불과하다.
+ 2011년에 네오나치 버러지새끼가 54명의 청소년들을 죽이고 정부 청사 건물을 폭파시키는 테러사건이 일어났었다. 그가 쓰레기같은 인간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그를 죽일 권리를 주지는 않는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희생자의 아버지.
튀니지: 무슬림 국가임에도 1973년부터 낙태가 합법화되어 여성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낙태를 할 수 있다고 한다. 2011년엔 독재자를 민중들이 끌어내리는 역사도 만들었는데 이때 이슬람 보수 정당이 여성들의 권리를 헌법에 포함하지 않으려고 하자 여성들이 들고 일어나 저지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여성이 획득한 권리를 강화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국가는 모든 분야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에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여야 한다."
"국가는 선출된 의회가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대표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국가는 여성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야 한다."
남성 의원들이 이에 자진해서 사퇴하고 여성 의원들이 국회의 절반을 차지했다는데 매우 바람직해보인다. 난 트위터에서 FC바르셀로나 팬들을 많이 팔로우하고 있고 그 중에 희한하게 튀니지 국적임을 프로필에 밝혀놓은 여성 분들이 많아서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여권에서 우리나라보다 앞서가는 나라였다니 너무 대단한 것 같다. 내가 튀니지 사람이었어도 내 국적에 자긍심을 느껴서 자랑하고 다닐 것 같다.
아이슬란드: 1975년에 아이슬란드 여성들은 일제히 여성 파업이라는 것을 했다. 이때 90퍼센트의 여성이 일을 하지 않음으로서 모든게 마비되었다고 하며 이를 통해 여성들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고 한다. 5년 후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가 선출되었다. 또한 최근 있었던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의 여파를 아이슬란드도 피해가지 못했는데 아이슬란드의 은행 중 유일하게 흑자를 기록한 곳은 여성에 의해 운영되는 곳이었다고 한다. 남자들은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자신에게 떨어질 큰 보상을 원하는 경향이 있어 남자들이 주가 되는 경우 위험하다는 진단. 비그디스 전 대통령님의 말씀도 좋았다. "여성은 지성과 잠재력을 지녔다. 세상을 구할 수 있는건 여성이다. 전쟁이 아닌 말로 구할 것이다."
마이클 무어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직접 목격하고 만델라의 당선, 미 동성결혼 합법화 등도 보게 되면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실행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렵고 복잡하지 않다고 말한다. 위에 나열된 선진제도들의 단초들도 이미 미국 역사에 있었다는 것을 예로 들며 단지 미국인들이 그것들을 되살리겠다고 마음 먹으면 되는 일이라고 말하며 끝마친다. 이런 희망적인 진보의 청사진들을 제시하면 꼭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느니 쟤네도 완벽한건 아니라느니 씨부렁씨부렁대는 새끼들이 있다. 예전엔 왜 그런 말을 하지? 역사공부는 헛으로 했나? 싶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좆도 모르면서 엄근진 빠는 것들이 전부 남자새끼들이었던 것 같다. 현상 유지가 자기들의 알량한 특권을 지켜줄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꼬장부리고 깽판 놓으려하는 것이다. 그걸 권위있고 논리적이게 꾸미려다보니 남초 특유의 안경걸이 밀어올리면서 아는 척하는 나무위키 말투가 생긴 것이고 말이다. 어쨌든 여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당연하게도) 여권이 신장되고 여성들의 능력으로 나라가 더 좋아지는 그런 것이 굉장히 좋아보였다.